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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류의 기원, 김염(金焰)과 빅토르 최(초이, Victor Choi)

by 산야대저택 2025. 2. 3.

김염

 

1. 김염의 가문과 배경

조선의 말기 고종황제는 서양의사들이 한국으로 들어오자 왕립병원을 설립하는것을 허락합니다. 그 후 고종황제는 그 왕립병원을 다시 백성들에게도 서양의술의 혜택을 받게 하도록 하고, 백성을 구제하는 병원이라는 뜻의 제중원(濟衆院)이라고 이름지었는데,이 병원이 바로 현재 한국에서 두 손가락에 꼽히는 '연세 세브란스 병원'의 모태가 됩니다.그리고 여기에 서양의 의술을 배워서 조선 최초로 의사가 된 사람이 바로 '김필순'이라는 사람입니다. 
김필순은 황해도 출신으로 제중원에 들어가 서양의사로부터 근대식 의술을 배우고, 정식의사 자격을 취득하게 되니 바로 조선의 제 1호 서양의사가 탄생한것입니다. 그후 조선이 일본의 침략으로 국권이 넘어가자, 친구였던 도산 안창호와 함께 중국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펼치게 됩니다. 

 

김필순의 여동생들도 독립운동 및 다양한 활동으로 유명합니다. 셋째 여동생 김순애(金淳愛)는 만주,상해등지에서 독립운동에 적극 참가하였을 뿐아니라, 남편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부주석을 지낸 '김규식(金奎植])'입니다. 네째 여동생 김필례(金弼禮)는 신지식인으로 대한민국에 YMCA를 설립한 분입니다. 하나 하나 열거하기 힘들 정도로 집안의 모든 형제자매들이 조선의 독립운동에 한 획을 장식한 한마디로 대단한 독립운동가 집안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2. 최초의 한류스타

이런 김필순의 셋째 아들은 '김염(金焰)'으로 독립운동이 아니라, 다른 면에서 매우 유명합니다. 김염(金焰)은 서울에서 태어났지만, 아버지가 중국으로 망명하여 중국국적을 취득하게 되니, 지금으로서는 중국에 거주하는 동포 즉, 조선족입니다 
그의 나이 10살때 아버지 김필순이 일본의 밀정에 의해 독살되었습니다. 이 일로 가족들은 어쩔수 없이 흩어지게 되었고, 김염은 상해의 고모 김순애의 집에서 의탁하여, 어려운 10대시절을 보냅니다. 힘든 10대를 보내면서 마음속에 꿈이 하나 피어났으니 바로 영화배우였습니다. 
당시 아시아 최초의 영화가 상영되고 제작되던 도시는 '상하이'였습니다. 영화배우 지망생 김염도 상해에서 영화판에 뛰어들어 온갖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고 영화인의 꿈을 포기 하지 않았는데,우연히  쑨위(孫瑜)감독의 작품 풍류검객(風流劍客)에 캐스팅 되어 본격적인 배우의 인생을 시작했습니다. 이후 두번째 영화 야초한화(野草閒花)에서는 주인공이 되었는데, 이 영화가 당시 최고의 히트작이 되면서 김염은 중국 영화계의 최고 인기 스타가 되었습니다. 참고로 김염의 본명은 김덕린 이었으나, 상해의 영화계로 들어가기로 결심한뒤 불꽃같은 삶의 살겠다는 다짐을 하면서 스스로 이름을 '염(焰)'으로 바꾸었습니다. 

 

그가 한참 영화활동 중일때 인기는 지금의 슈퍼스타와 비슷했습니다. 야초한화 이후 약 20편의 영화를 찍었는데, 수많은 젊은이들이 그를 우상으로 생각하였고, 사진을 사모으고, 그를 보기 위해서 극장에는 긴 행렬이 생길 정도였습니다. 1934년 중국에서 뽑은 최고의 인기스타에 김염은 선호도 1위를 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렇게 스타가 된 김염의 마음속에는 부모와 가족으로 부터 물려받은 일본에 대한 저항정신이 있었고, 훗날 중국을 점령한 일본이 홍보영화를 만들면서 김염에게 영화출연을 강력하게 요청한 일이 있었는데, 김염은 '총알이 머리와 가슴에 박혀도, 일본영화는 출연하지 않겠다'며 거절했다고 전해집니다. 오히려 그는 몰래 독립운동자금을 지원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오히려 김염은 중국인들의 독립심을 고취시키기 위한 영화 '대로大路'에 출연하였고, 당시 중화권 최고의 스타가 열연한 애국 영화는 중국 젊은이들의 마음을 뜨겁게 하였으며,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에 반대하는 투쟁의 씨앗이 되기도 합니다. 참고로 김염의 죽음을 곁에서 지킨 아내 친이(秦怡)는 중국의 주은래(周恩来) 총리가 '중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라고 부를정도의 미녀 배우였으며, 김염과 친이의 결혼식에 대해서는 '중국의 공주를 데려갔다' 라고 했다는 말이 전해집니다. 

훗날 마오쩌뚱 주석은 중국을 통일한후 김염에게 '국가1급 배우'로 임명하기도 하였습니다. 비록 자유로운 예술정신을 지키기 위하여 공산당에는 가입하지 않았지만,김염의 삶은 부와 명예를 무한대로 누릴수 있었지만, 가족의 뿌리를 잊지 않고 , 예술가로서 그리고 민족의 자존심을 지킨 진정한 1세대 한류 스타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위대한 영화인이자 일본에 끝까지 항거한 의사였고, 그의 이름처럼 불꽃처럼 살다간 진정 한류의 원조, 김염의 현재 무덤은 상해용화열사능원(上海龙华烈士陵园)에서 조용히 눈감고 있습니다.  

 

3.  고려인 한류스타 빅토르최

김염이 조선족으로서 중화권 한류의 원조였다면, 러시아를 주름잡은 한류의 원조는 빅토르 최(또는 빅토르 초이, Victor Choi)가 있습니다. '고려인'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과거 조선반도에 있었던 국가'고려'가 아니라, 현재 이 말의 뜻은 소련과 중앙아시아 지역에 살고 있는 '조선인'들을 일컷는 말입니다. 
어떻게 보면 고려인의 기원은 스탈린 때문이었습니다. 일제시대 중국의 동북지역에서 더 위쪽으로 러시아 연해주까지 이주해있었던 조선인들은 약 20만명이상이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1937년 스탈린은 '일본인과 구분이 되지 않으므로 위험하다' 라고 하여, 연해주 일대의 조선인들을 강제로 러시아 내륙쪽으로 강제 이주 정책을 펼쳤습니다.
일본은 피해서 도망쳐서 살았으나, 러시아 입장에서 일본인처럼 생겼다는 이유때문에 뜻밖에 다시는 고향인 조선으로 돌아갈 수 없는 머나먼 시베리아를 넘어 중앙아시아 지역으로 강제 이주된 것입니다. 

 
이렇게 강제 이주당했던 어떤 고려인의 아버지와 우크라이나 출신 어머니 사이에서 혼혈로 태어난 빅토르 최는 1962년 혁명과 예술의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과거 레닌그라드)에서 출생했습니다 음악을 좋아했던 빅토르초이는 10대 때 락그룹을 결성했다가, 불순분자로 찍혀서 퇴학당합니다. 퇴학후 힘들게 막노동을 하면서도 락음악활동을 하던 그를 우연히 당시 유명 러시아 그룹의 눈에 띄어 정식으로 키노(Kino) 라는 밴드를 결성하여 음악활동을 하였습니다. 이후 빅토르 초이는 전쟁에 반대하는 음악을 다수 발표하면서, 전쟁에 동원되어 가는 러시아 청춘들의 애환을 공감하여, 러시아에서 음악 영웅으로 떠올랐습니다. 

빅토르 최

그의 그룹이 한때 얼마나 인기가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로는 1990년 러시아에서 가장 큰 공연장인 '레닌스타디움'의 콘서트에 모인 군중의 숫자가 6만명이 넘었다고 합니다.그리고 같은해인 8월 빅토르 초이는 의문의 교통사고로 사망했습니다. 
그의 사망소식은 빠르게 신문을 통해서 전파되었고, '빅토르가 죽었다' 라는 문구는 러시아 젊은이들 사이에서 '빅토르는 (우리들 가슴에) 살아있다' 라는 문구로 바뀌어서 다시 수많은 매체를 타고 전파되었습니다.러시아는 1997년 그의 기념 우표를 발표하기도 했고, 그의 이름을 딴 도로가 생겼고, 모스코바에는 현재 빅토르 초이의 추모의 벽이 있을 정도로 짧은 생을 살았지만, 빅토르 초이가 러시아의 대중음악에 남긴 족적은 큰 발걸음이었습니다. 현재 러시아는 빅초르초이를 '명예가수 전당'에 기념하며 헌화하고 있으며, 그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 '레토 LETO' 가 전세계에 개봉되기도 했으며, 그의 사망 10주기였던 지난 2000년에는 러시아 록밴드들이 모여서 '헌정앨범'을 공동으로 만들었다고 할 정도이니, 빅토르 초이의 러시아내에서의 인기와 인지도는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한류라는 것에 대하여 꼭 엄청난 의미를 부여할 필요가 없을 수도 있겠지만, 가끔 현재 우리가 잘 몰랐지만 훨씬 더 전에 불꽃처럼 살아갔던 한류 스타들은 이미 중국과 러시아에서 조상들의 아픔을이겨내고 대 스타로서 그 자존심을 지켜나갔으며, 그들의 예술성에 많은 국가의 사람들이 이미 오래전부터 박수를 보냈음을 '김염'과 '빅토르 최'를 통해서도 충분히 느낄수 있고 기억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