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중국무술의 기원과 상식
중국에는 쿵푸, 한국에는 태권도, 일본에는 가라데 ! 흔히들 알고 있는 중,한,일의 대표 무술의 이름입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이중에서 중국의 쿵푸에 얽힌 간단한 상식을 알아볼까 합니다. 중국 무술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의견이 있겠지만, 가장 신빙성이 있는 의견은 '달마대사'의 수련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달마대사는 자연과 동물의 여러가지 움직임을 연구하여, 불교 고유의 호흡법과 연계한 수련법을 만들어서 제자들에게 전수해줬다는 설이 있는데, 이로 인하여 소림사의 무술이 시작되었다고 보는 것이 가장 일반적인 중국 무술에 대한 의견입니다. 그런데 이 'KONGFU 쿵푸' 라는 단어가 좀 재미 있습니다. 功夫 의 원래 글자 그대로의 의미는 '무엇인가를 학습하여 어느정도 수준'까지 올랐는지를 의미하는 말입니다. 그러니 서로의 功夫(공부)가 얼마나 되었냐는 질문은 '서로의 수준'이 어느정도 되었는지? 라는 뜻으로, 서로 존대하거나, 서로 비교할때 쓰는 단어였습니다.
따라서 순수하게 무술을 의미하는 말은 쿵푸(功夫)보다는 우슈(武术) 가 더 정확한 표현입니다. 그런데 왜 '쿵푸'가 유명해졌을까요?
먼저 중국 무술에 대한 기본 상식을 조금 생각해봅시다. 무술이라는 것은 크게 보면 4가지 범위를 가지고 있습니다.
첫번째는 호신, 즉 몸을 보호하는 것입니다.
두번째는 양생, 즉 몸을 활기차게 하는 것입니다.
세번째는 정신, 즉 생각의 수련입니다.
네번째는 의학, 즉 몸을 아프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호신,양생,정신,의학의 범위에서 종합적으로 발전된 중국의 무술은 달마대사의 역근경 같은 기공체조도 있고, 화타가 만든 오근경이라는것도 있습니다. 분명한것은 무술을 연마한다는 것은 단지 '싸움의 기술'을 연마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과 육체의 조화 그것을 통한 깨닳음을 같이 의미하는 것이 분명한것 같습니다. 중국의 경우 '진령산맥(秦嶺山脈)'이라는 큰 지형이 있습니다. 산시성과 스촨성을 가로지르는 이 산맥은 중국의 중앙을 반으로 나누는 주요한 지역적 분기점 같은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산맥의 또 다른 별명은 중국의 남쪽 문화와 북쪽 문화의 분기점이기도 합니다. 무술의 경우도 진령산맥을 기점으로 하여 남쪽무술과 북쪽 무술로 나뉘어지는 것이 정설이며, 북쪽의 무술은 강하고, 남쪽 무술은 부드럽습니다. 북쪽의 사람들은 말을 타고 들판을 달리고, 깊은 산속에서 내공을 익혔고, 남쪽의 무술은 좁는 공간에서 심지어 실내에서 무술을 익히는 것을 영화나 드라마에서 볼 수 있습니다. 복장을 봐도 남쪽 사람들의 옛날 복장은 소매의 폭이 넓고, 옷깃이 축쳐지고 선이 크고 아름답고, 북쪽에서는 소매나 종아리를 묶어서 입는 복장이 많이 있습니다. 유심히 보지 않으면 안보였던 것들이지만, 중국의 역사와 지리를 잘 생각해보면 분명한 구분이 있으며, 이러한 구분의 큰 축이 '진령산맥 秦嶺山脈'이라고 생각하면 편합니다.
2. '쿵푸' 와 '의화단'
앞서 쿵푸를 이야기 했습니다. 쿵푸는 청나라 말기 광동지방에 많이 진출했던 서양사람들이 우슈라는 말보다 그들이 자주 들었던 '쿵푸' 라는 말을 영어로 쉽게 표기하면서 다시 중국으로 들어온 단어입니다. 당시 쿵푸는 외세세력들에게 꽤 유명한 이름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의화단 운동' 때문입니다. 의화단이라는 청나라 말기 서양세력의 침략으로 나라가 무너지는 것을 경험하게 된 백성들이 중국전통의 무술을 강하게 단련하여 서양세력을 물리치자는 무술에 의한 '국가 재건 운동'쯤되는 중국민중의 저항정신 운동이었습니다. 안타깝게도 훗날 이것이 너무 변질되어 무차별적인 서양인들 또는 서양인과 소통이 있는 자국인들까지 살해,폭력 하는 일들이 많아지면서, 오히려 청나라 말기를 더욱 암울하게 하기도 했다는 평도 있지만, 어쨓거나 이 의화단 운동은 한편으론 중국인의 마음속에 '무술단련 = 건강한 신체 = 강한 중국' 이라는 의식을 심기도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의화단은 훗날 무차별적인 폭력성으로 인하여, 서양과 청나라 정부에 의해서 진압당했고, 단체로 모여서 싸움을 연마하는 행위는 금지 되었습니다.
중국의 무술은 몇천년간의 중국의 역사와 그 흐름을 같이 하고 있습니다. 단지 몸을 강하게 하는 것 뿐아니라, 정신과 의술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크게보면 남쪽과 북쪽의 무술은 다른 모습을 가지고 있었지만, 나라가 어려워지자 다양한 무술을 통합하는 '정무회'를 기점으로 큰 틀에서 통합이 되었습니다. 현재 정무회는 '정무체육회'로서 중국 우슈의 총 본산의 역할을 하면서, 이제는 국민의 체력증진과 건전한 스포츠로까지 발전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3. 곽원갑, 황비홍, 엽문, 이소룡
무인 '곽원갑(霍元甲)'은 중국의 역사나 영화에 꽤나 알려진 영웅입니다. 곽원갑은 영화로도 유명한 황비홍의 스승이며, 청나라 말기 풍전등화와 같은 조국에 대하여 애국심이 큰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집안은 대대로 미종권(迷蹤拳)이라는 무술비법이 전해지고 있었습니다. 일본이 중국을 침략하여 워낙 악날하게 중국인들을 대하는 것을 참지 못한 곽원갑은 우연히 일본 공수도 달인과의 결투를 하게 되었고, 그 결투를 이김으로서 절망적인 중국인들에게 영웅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공개 결투에서 치욕스런 패배를 한 일본인은 의사를 시켜서 곽원갑을 독살하였습니다. 어쨓거나 곽원갑은 무술인들을 모아서 '정무회'를 만든 장본인이며, 그를 중심으로 많은 저항정신을 가진 무술인들이 모였습니다.
그리고 황비홍의 경우 또한 대대로 유명한 병원이자 약국인 바오지림의 의사였지만, 곽원갑의 정신을 이어 받은 제자중의 한명인것입니다. 황비홍인 유명해진 이유 또한 곽원갑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습니. 서양사람들은 중국인을 멸시하고 무시했는데, 그중에 하나가 중국인과 개와의 싸움을 즐기기도 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보고 있을 수 없었던 황비홍은 개뿐만 아니라 싸움을 붙인 서양인까지 맨손으로 때려 죽여버렸는데, 그 사건으로 인하여 민중의 영웅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워낙 입소문을 타게 되어, 한때 가짜 황비홍도 많았고 여기저기 도시마다 '황비홍이 나타났다'는 말들이 돌아서 실제 인물보다 조금 부풀려져 있기도 한 존재가 되기도 했습니다. 참고로 성룡이 젊었을때 찍었던 유명한 영화 '취권'에서 성룡이 맡은 역할의 이름도 '황비홍'입니다.
청나라 말기 민중의 저항과 애국심을 대표하는 무술인으로 '곽원갑'과 '황비홍'이 있었다면, 중국 공산당의 근대로 오게되면 '엽문'과 '이소룡'이 있습니다. 엽문(葉問)은 원래 청나라말 광동성에 살았지만, 청나라 몰락이후 또한 중국과 일본의 중일전쟁을 기점으로 홍콩으로 건너갔습니다. 엽문의 스승은 진화순(陳華順)으로서, 영춘권(詠春拳)의 1대종사였으며 당시 남쪽 무술의 최고수였습니다. 그의 제자로서 유명한 인물이 바로 이소룡인데, 원래 이소룡은 엽문의 명성을 듣고 찾아가서 제자가 될것을 요청했으나 엽문은 거절했습니다. 그런데 당시 이소룡은 '뛰어난 춤실력'을 갖춘 어린아이였습니다. 그리고 그의 춤실력을 알아본 엽문의 할아버지가 춤을 배우는 대신 엽문에게 무술을 가르쳐 주라는 것이 시작점이 되어 이소룡은 영춘권을 배울 수 있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엽문의 업적중에는 '공식 무술 대결에서 한번도 진적이 없는' 대 기록이 있으며, 홍콩에서의 그의 명성은 꽤 높았습니다.
그리고 이소룡은 스승으로 부터 배운 영춘권을 한단계 더 발전시켜 '절권도'를 완성했습니다. 그리고 홍콩의 영화산업과 함께 파급력이 커져서, 아시아의 작은 동양인이 거대한 서양인을 무술로 물리치는 장면들은 세계적인 관심을 받게 되었고 최고의 영화스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혼란의 시대에 영웅이 나듯이, 청나라 말 국가가 위험한시기에서 부터 곽원갑, 황비홍 같은 영웅스토리는 민중의 가슴을 뜨겁게 만들었고, 엽문과 이소룡은 세계를 누비는 우슈의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가라테, 태권도, 우슈중 어느것이 나을까? 라는 단순 비교적 시각으로 보기보다는 이렇게 긴 역사와 이야기를 가지고 있는 무술인들에 대한 상호 존중과 상대를 인정하는 따뜻한 올바른 예의를 가지고 상호 인지를 높혀가는 것 또한 글로벌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상식중에 하나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