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무정 장군의 탄생과 성장
1904년, 함경북도 경성군에서 한 소년이 태어났습니다. 그는 지주 집안의 아들이었지만, 성격이 곧고 강직했으며 싸움을 잘했습니다. 그러나 1910년, 일본이 조선을 강제로 병합하면서 나라를 잃게 되었습니다. 이 소년은 조국을 되찾아야겠다는 결심을 하고 스무 살에 중국으로 건너가 군대에 입대합니다.
그의 군대에서의 특기는 대포 사격이었습니다. 당시 중국은 좋은 대포를 보유하지 못했지만, 그는 백발백중의 실력을 자랑했습니다. 그의 포술 실력은 이후 중국의 중요한 전투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됩니다.
1925년, 그는 중국 공산당에 가입했지만, 장제스(蔣介石)의 공산당 탄압 정책으로 인해 체포되어 사형을 선고받습니다. 다행히 살아남은 그는 계속해서 공산당원으로 활동하며, 후에 펑더화이(彭德懷)의 부대에 합류하게 됩니다.
당시 공산당 부대에는 75문의 포가 있었으나, 이를 제대로 다룰 줄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습니다. 하지만 무정 장군은 뛰어난 포술 실력으로 국민당군과의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습니다.
2. 마오쩌뚱과 조선의용군
공산당이 국민당군에 쫓겨 1만 3천 킬로미터를 이동하는 대장정(大長征)에 참여한 그는, 어려운 환경에서도 박격포를 이용해 국민당군을 격퇴하는 놀라운 능력을 발휘했습니다.
그의 신기에 가까운 포술 덕분에 마오쩌둥(毛澤東)은 그를 사단장으로 임명했으며, 이후 팔로군(八路軍) 전체의 포병 사령관을 맡게 되었습니다.소련군이 중국 공산당에게 무기를 지원하기 전, 팔로군의 실력을 의심하며 "포탄 궤적을 계산할 줄도 모르는 군대에게 포를 지원할 수 없다"고 말한 적이 있었습니다.그러자 무정 장군은 손가락과 눈짐작만으로 포탄의 탄착점을 유도해 명중시켰습니다. 이를 본 소련군 장교들은 깜짝 놀랐고, 그는 "전쟁 중에 계산하고 포를 쏘는 군대도 있습니까?"라는 말로 소련군을 무색하게 만들었습니다.
1940년, 그는 조선의 독립을 위해 윤세주(尹世胄), 김두봉(金枓奉) 등과 함께 조선의용군을 창설하고 사령관이 되었습니다. 이후 조선의용군은 팔로군과 협력하며 일본군과 여러 차례 전투를 치렀습니다.
1942년, 팔로군 총사령부가 일본군에 포위되었을 때, 조선의용군이 앞장서 일본군을 유인하며 탈출로를 확보했습니다. 이때 펑더화이와 덩샤오핑이 무사히 탈출할 수 있었습니다.
조선의 독립을 위해 그는 중국 공산당 내에서 보장된 영광과 권력을 포기하고 북한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김일성 정권에서 숙청을 당해 탄광의 하급 관리로 좌천되었습니다.그를 아끼던 중국 공산당의 압력으로 다시 중국으로 돌아오게 되었으나, 전장에서 너무 많은 시간을 보낸 탓인지, 혹은 숙청의 후유증 때문인지 50세도 되지 않아 병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나라를 잃고도 혁명을 위해 중국과 조선을 오가며 헌신했던 무정 장군. 그는 초국가적 정신을 가진 군인이었으며, 조선의 독립을 위해 자신의 삶을 바쳤습니다.혹시 중국의 대협곡인 태항산 협곡을 방문할 기회가 있다면, 조선의 독립을 위해 헌신했던 무정 장군과 조선의용군을 떠올려 보시길 바랍니다.
3. 잊혀진 영웅들 – 무정 장군과 함께한 조선 혁명가들
무정장군처럼 중국의 혁명시기에 일제시대 억압받았지만 조선인으로서 조선의 독립을 위하여 중국과 러시아에서 용감하게 활동한 위대한 인물들이 의외로 꽤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역사의 흐름속에서 자연스럽게 대한민국의 교과서에서는 찾기 힘든 인물들이 있습니다. 그중에서 우리가 기억하면 좋은 몇명의 무정장군과 함께 또는 같은 시기에 활동했던 분들을 사례로 들어보겠습니다.
ㅇ 김산 (본명: 장지락, 1905~1938)
김산은 공산주의 혁명가이자 항일운동가로, 1920년대부터 중국에서 활동하며 중국 공산당과 함께 일본군과 싸웠습니다. 그는 띄어난 외모와 5개국어를 유창하게 했던 명석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조선 혁명가들의 국제적인 활동을 강조하며, 조선 독립을 위한 무장투쟁을 온몸을 바쳤습니다. 하지만 1938년 중국 공산당 내 숙청 과정에서 안타깝게 희생되었습니다. 그의 삶은 미국 언론인 님 웨일즈의 저서 「아리랑」에 기록되어 세계적으로 알려졌으며, 도올 김용옥의 TV 강연에서도 한때 자세하게 소개된 적이 있습니다.
ㅇ 박효삼 (1915~1942)
박효삼은 조선의용군으로서, 항일 무장투쟁에 앞장섰던 뛰어난 인물입니다. 그는 1941년 조선의용군이 팔로군과 함께 일본군과 전투를 벌일 때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특히 태항산 전투에서 용기있는 선택과 전략으로 조선의용군의 용맹함을 보여주었지만, 1942년 전투 중 전사할 수 밖에 없는 작전이었기에 안타깝게 목숨을 바쳤습니다. 하지만 태항산에 간다면 많은 중국인들이 아직도 전투흔적이 있는 담벼락에 그의 이름을 기리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ㅇ 최창익 (1896~1957)
최창익은 위대한 독립운동가였습니다. 그는 당시의 많은 지식인들처럼 조선과 중국을 넘나들며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을 펼쳤습니다. 특히 그는 중국 공산당과 연계하여 조선 독립운동을 지원했으며, 조선의용군 창설에도 깊이 관여했습니다. 하지만 해방 후 북한에서 활동하였고, 김일성 정권에 의해 숙청당하는 비운을 맞게되었으며, 대다수의 독립운동가중 특히 사회주의 독립운동가들은 현재 한국의 역사교과서에서는 보이지 않습니다.
대한민국이 좀 더 위대한 나라가 되기위해서는 이런 잊혀친 독립운동가들을 많이 기억하는 기회가 많아지면 좋겠습니다.
혹시 중국의 아름다운 관광지인 중국 태항산 협곡을 방문할 기회가 있다면, 조선의용군과 함께 목숨을 바친 이 위대한 독립운동가들을 떠올려 보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