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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랭크로이드라이드,강화도조약,오쿠라기하치로,중력난방

by 산야대저택 2025. 2. 2.

동경 제국호텔

 

1. 세계적 건축가 프랭크로이드 라이트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Frank Lloyd Wright)라는 건축가가 있습니다. 
그는 르 코르뷔지에(Le Corbusier), 미스 반 데어 로에(Mies van der Rohe) 와 함께 근세 건축의 세계 3개 거장으로 불리는 건축분야의 위대한 인물중 한명입니다. 그가 만든 건축작품은 '안'과 '밖'의 조화미가 뛰어난 것으로  유명하며, 동시에 미술성,독창성,예술성이 뛰어나서 지난 2019년 제 43차 세계문화유산위원회에서는 그의 건축작품을 '세계 문화유산'으로 선정하기도 하였습니다. 
세계 문화유산이 개인의 건축작품으로 선정됨으로 인하여 다시 한번 그의 인생과 작품들이 사람들의 관심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업적을 남긴 프랭크로이드라이트는 과연 어떻게 하여 이토록 위대한 '영감'을 가진 건축가가 되었을까요?특히나 많은 사람들이 그가 만든 건축물의 위대함에 한결같이 입을 모아 칭찬하는 '동양과 서양의 절묘한 조화'는 과연 어떤 것일까요?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는 1867년에 미국에서 태어납니다. 공부도 잘했고, 모범생이었지만, 가정형편은 어려웠습니다. 어려운 형편으로 고학을 하고 삶을 살아야 했던 그는 20살부터 유명한 건축사무서에서 일을 하기 시작했고, 운좋게도 그가 첫 근무한 건축 설계 사무소는 당시 미국에서 최고로 평가받는 '루이스 설리번(Louis Henry Sullivan) 건축사무소'였습니다. 
뛰어난 건축사무소에서 근무를 하자, 프랭크는 빠른 속도로 건축에 대한 많은 것들을 배웠고, 그것을 활용하여 자신의 건축가로서의 명성을 조금씩 쌓아 갑니다. 부와 명성을 착착 쌓아가던 그에게 뜻밖에 불행이 닥쳐오게 됩니다. 바로 아내와 자식들이 모두 갑자기 살해되거나 죽음을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이로 인하여 본인도 심각한 우울증 및 희망이 없는 시간을 맞이하게 됩니다. 
지금이야 세계 최고의 건축가로 추앙받지만, 당시는 아직 예술의 영감이 부족했고, 게다가 가족을 잃어버린 후 삶이 힘들어진 그 때 그의 인생에 어떤 전환점이 생깁니다. 때는 1916년 겨울이었습니다. 일본의 어떤 대 부호가 그에게 연락이 온것입니다. 그를 불렀던 일본 최고의 재벌가의 이름은 '오쿠라 기하치로(大倉喜八郞)'라는 사람으로, 그가 거부가 되었던 이유는 사실 일본의 조선 침략이었습니다.

 

2. 강화도 조약과 부산항 개항, 일본인 거상 오쿠라 기하치로

조선은 1876년 강화도 조약으로 일본의해서 강제로 부산항을 개항하게 됩니다. 항구가 개항되자 상업의 촉이 발달했던 오쿠라 기하치로는 신속히 부산으로 들어와서 잡화점을 열어 단기간에 상당한 돈을 벌수 있었습니다. 당시 일본의 상인들은 조선에 들어오기만 하면 온갖 특혜를 받았으니, 당연히 돈을 버는 것은 어렵지 않았습니다. 오쿠라 기하치로는 돈을 벌게되자, 판을 더 크게 벌렸습니다. 바로 일본 정부에 신속하게 결탁한 것입니다. 자본이 정치의 힘을 얻으면 이익의 규모는 놀랍도록 빠르게 성장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그는 일본 정부에게 온갖 뇌물을 주고 기회를 독점하여, 금융, 건설, 그리고 압록강의 나무 벌목업까지 사업을 대대적으로 확장하게되었습니다.  그러자 더 큰기회가 생깁니다. 때마침 발발한 청일 전쟁은 그에게 군수물자의 유통,판매를 할수 있게 하였고, 마침내 그는 전쟁속에서 무한대의 이익을 챙기게 되었습니다. 이로 인하여 거상(巨商)이 된 것입니다. 

 

 

오쿠라 기하치로 , 조선인을 착취하여 경복궁의 침실을 일본으로 밀수하다 

이렇게 군사정권을 등에 업고, 막대한 부를 거머지게 된 오쿠라 기하치로는 조선에서 두려운게 없어졌으며, 마침내 정도를 넘어가는 일을 벌이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조선의 문화재를 닥치는데로 일본으로 빼돌린것입니다. 당시 조선의 입장에서는 최악의 인물이었지만, 일본의 입장에서는 특별히 하지마라고 할 이유도 없던 시대였습니다.문화재 뿐만아니라, 심지어 그는 조선의 경복궁에서 세자의 침실로 사용하던 '자선당(資善堂)' 건물을 통채로 일본으로 가져가서 저택의 앞마당에 두고 별채로 사용하는 기행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신라의 왕릉에서 나온 금관, 조선왕의 침실에 있던 의복, 고문서등 닥치는데로 일본으로 조선의 '귀한 물건'들을 싼값에 사거나, 무단으로 유출했는데,훗날 그가 조선에서 가져간 미술품은 약 3700점, 서적은 1만6천권 정도였다고 합니다. 
지금 대한민국의 서울에는 선린상고라는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학교가 있는데, 이는 그가 당시 자신에게 도움을 주었던 이토히로부미(伊藤博文)를 존경하는 의미로 이토히로부미(伊藤博文)이 적은 문구 '한일우호선린'이라는 글귀에서 '선린(善隣)'이라는 글자를 따서 세웠던 학교재단의 이름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조선을 탈탈 털어 큰 부를 축척한 그가 당시 일본에서 최고의 호텔을 짓는 프로젝트를 따고서 연락한 건축가가 바로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였습니다. 

 

3. 도쿄 제국호텔과 중력난방

일본의 대 거부로부터 초청을 받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는 망설인 끝에, 일본으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때는 12월 한겨울이었으며, 프랭크가 일본의 거상을 만났을때는 폭설까지 오는 상황이었습니다. 간단히 미팅을 해보니, 일본이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에게 부탁한 건설프로젝트는 '도쿄 제국호텔(데이코쿠 호, Imperial Hotel )' 이었습니다. 당시 일본은 국왕의 명령으로 '서양에 뒤쳐지지 않는 훌륭한 호텔'을 만들기로 결정하고, 이를 위해서 오쿠라 기하치로가 미국의 유명한 건축가를 초청한 것입니다. 그러나 긴 여행과 한겨울의 추위는 그 둘의 첫만남을 어렵게 만들었고, 첫 미팅 장소에서 프랭크는 너무 추워서 대화를 거의 하기 힘든 상황이 었습니다. 그러자 일본은 그에게 '코리안룸, KOREA ROOM'이라고 간판이 있는 곳으로 대화장소를 옮겼습니다. 문을 열고 들어간 프랭크는 놀라움을 금할 수 가 없었습니다. 방안은 바깥의 추위와 완전히 다르고 매우 따뜻하고 포근했던것이, 잠시만에 몸의 상태가 좋아졌기 때문입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마치 문을 열고 다른 세상으로 들어간것 같았다. 그 때의 경험은 하나의 '기후적 사건'이었다" 훗날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는 자신의 자서전에 이렇게 기록해두었습니다. 그가 그날 문을 열고 들어간 따뜻한 방은 바로 오쿠라 기하치로가 경복궁에서 가져온 '자선당(資善堂)' 이었으며, 그가 따뜻함을 느낀 이유는 자선당의 '온돌'때문이었습니다. 그날밤 프랭크는 통역을 불러 밤새도록 자선당의 난방구조를 듣고, 배운뒤 '제국호텔의 설계'에 이를 반영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세계 최초의 근대화된 '온돌'이 적용된 건물이 탄생한 배경입니다. 
이후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는 미국으로 돌아간뒤 자신이 설계하는 많은 건물에 '온돌'을 설치했습니다. 그가 설치한 온돌 방식은 기존의 온돌방식이 아니라, 당시에 유행했던 '라지에이터'를 건물의 바닥에 깔아 따뜻한 기류가 바닥부터 흐르게 한 원리였으며, 현재 흔히들 '한국식 보일러' 라고 부르는 난방방식의 원조가 됩니다. 처음 온돌을 접했던 따뜻함을 잊지 않았던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는 '제국호텔'의 설계를 시작으로 동양과 서양의 문화의 접목을 꾸준히 그의 건축작품에 반영했을 뿐만 아니라,온돌의 놀라운 난방효과를 나중에 그의 자서전을 통해서 '중력난 Gravity heating system' 이라고 기록해두었습니다. 현재 한국의 보일러 시스템은 한국 뿐 아니라, 미국, 일본, 중국등 세계 각국에서 바닥을 난방하는 유일한 방법으로 각광 받고 있으며, 지속적으로 시장이 넓어지고 있습니다. 역사는 늘 아이러니가 숨어 있는 것 같습니다. 약 백년전 조선의 문화재를 있는데로 가져간 일본인 상인과, 부와 명성을 얻고 거만했었으나 아내와 자식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실의에 빠진 미국인 건축가의 우연한 만남은 조선의 '온돌'을 세상에 알리는 시작점이 되었으니 말입니다.